전화가 울린 것은 3악장쯤이었다.
— 이강임 씨 아시죠.
물음표가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이강임을 기억했다. 고객이었다.
— 어머니가 지난주에 돌아가셨어요.
레코드 바늘이 홈 위를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악보다 작은 소리였는데 갑자기 음악보다 크게 들렸다.
보험금 청구를 하려고 전화를 했다고 확신하면서 빈소에라도 다녀와야겠다, 또 이 다리를 하고서는 어떻게 가나… 짧은 찰나 여러 생각이 몰려왔다.
전화를 해 온 이강임 씨의 딸은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 봉투를 남기셨어요. 선생님 성함이 적혀 있어요.
나는 다리를 내려놓으려다 멈췄다. 다리가 아직 불편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 …어떤 봉투요?
— 열어보진 않았어요. 어머니께서… 선생님께 직접 전해달라고 하셨거든요.
2
전화를 끊고 한참이 지났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선생 호칭이 나를 약간 우쭐하게 했다. 말러 9번은 4악장으로 넘어가 있었다. 마지막 악장, 아다지오. 이 악장이 끝날 무렵 피아니시모가 지속된다. 아무 소리도 없는 소리를 위해 바늘이 빈 홈 위를 돈다. 바늘은 아마도 라벨 위로 올라가서 드르륵 소릴 내며 나를 멈춰주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무엇이 진짜 코다(coda)인지는 나도 잘 몰랐다.
나는 이강임이라는 사람을 열두 해 동안 알았다. 아니, 알지 못했다.
열두 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보험료를 납부한 그 고객이다. 매년 새해 안부 문자를 보내면 고맙습니다,라는 답장이 왔다. 연례적인 연락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고액을 가입한 고객이 아니었고, 어떻게 소개받은 고객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외에 다른 답신을 받은 기억도 없다. 생각해 보면 나도 고맙습니다 외에 다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궁금했다. 내게 남긴 봉투라니. 그것도 죽은 사람이. 무엇인가 내게 남겼다는 사실도 중요했지만 사자에 대한 도리도 중요했다.
목발을 짚고서 춘천으로 갔다. 운전을 해 줄 사람이 없었고 차도 마땅찮았다. 평소보다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려서 춘천으로 갔다. 청량리역에 사람이 정말 많았다.
춘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추웠다.
역을 나오자마자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11월의 바람이었지만 이미 1월의 기세를 품고 있었다. 청량리에서 출발할 때는 이렇지 않았다. 서울은 서울이고 춘천은 춘천이다,라는 당연한 사실이 한 방에 피부로 들어왔다. 나는 목발의 높이를 다시 조정했다.
택시를 탔다. 주소를 보여주자 기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조용히 운전했다. 라디오에서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강원 영서 지방, 오늘 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겠습니다. 매우 건조하니 화재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건조,라는 단어가 왠지 귀에 걸렸다.
세탁소는 오래된 상가의 1층에 있었다. 간판에는 ‘강변세탁’이라고 적혀 있었고, 글씨의 한쪽 획이 바랜 채로 남아 있었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유리문 너머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자가 이강임의 딸이라는 걸 나는 한눈에 알았다. 물론 이강임의 얼굴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본 적이 있다면 기억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알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앎이 있다.
3
여자가 문을 열었다.
—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 춘천이 멀군요.
나는 짧게 말했다.
— 멀죠.
여자도 짧게 받았다.
그 대답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나는 여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세탁소 안은 모든 게 정지해 있었다. 다림질 기계, 재봉틀, 건조대. 사람이 일주일 동안 손대지 않은 공간이 가지는 특유의 부재가 있었다. 공기도 그 부재에 맞춰 조용히 놓여 있었다.
— 다락방에 올라가실 수 있을까요?
여자는 내 다리를 보며 물었다.
— 올라갈 수 있어요. 시간은 좀 걸릴 거예요.
— 기다릴게요.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나는 목발을 한쪽 팔에 끼고 난간을 잡으며 한 계단씩 올라갔다. 열세 계단이었다. 중간에 한 번 멈추고 숨을 골랐다. 여자는 도와주지 않았다. 그저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발밑에서 나무가 살짝 신음하는 소리가 났다. 오래된 집이 내는, 누군가의 무게를 기억해 내는 소리로 들렸다.
다락방의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냄새였다. 오래된 종이와 바이닐, 그리고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오래 혼자 있었던 공간의 냄새. 햇빛은 작은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왔고, 그 햇빛 안에서 먼지가 떠 있었다.
LP 박스가 여섯 개 있었다. 나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한 번 더 세어 보았다. 여섯. 왠지 그 숫자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여섯이 아니라 다섯이었다면, 혹은 일곱이었다면, 어쩌면 나는 거기 없었을지도 모른다. 실없이 그런 느낌이 들었다.
— 어머니는 이 방에 자주 올라오셨어요?
별 의미 없이, 나는 물었다.
— 매일요.
여자가 말했다.
—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정확히 8시 30분에요.
여자 어깨너머로 세탁소 뒤편의 살림 공간이 보였다.
— 매일 8시 30분…
매일? …나는 박스 하나를 열었다. 가장 위에 있는 LP를 꺼냈다. 재킷은 바랬지만 레코드는 거뜬했다. 빌 에반스(Bill Evans)와 스탄 게츠(Stan Getz)가 함께 연주한 앨범 But Beautiful 이었다. 나는 재킷을 뒤집어 보았다. A면 트랙 리스트. B면 트랙 리스트. B면의 첫 곡은 ‘My Heart Stood Still’ 이었다.
— 이상한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여자는 뜸을 들이다 역시 물음표 없이 허락을 구했다.
— 어머니는 선생님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하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저는 선생님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에반스와 게츠의 LP를 천천히 박스에 다시 넣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여자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다락으로 올라온 여자는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 앞에 놓았다.
4
봉투는 오래된 갈색이었다. 표면에 손자국 같은 것이 희미하게 있었다. 봉투를 쥐었다가 놓기를 여러 번 반복한 사람의 손자국. 한 해가 아니라 여러 해 동안의 손자국.
— 열어 보시겠어요?
— 지금요?
— … 언제든요.
나는 봉투를 한쪽 무릎 위에 놓았다. 열기에는 봉투가 너무 얇았고, 열지 않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이상한 조합이었다. 물리적으로는 얇고, 감각적으로는 무거운 것. 그런 것들도 세상에 있다.
여자가 내려가면서 말했다.
— 아래에 커피가 있어요. 다 보시면 내려오세요. 천천히 오셔도 돼요.
여자가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혼자 남았다. 먼지가 햇빛 안에서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누군가가 아주 오랫동안, 아주 조용하게 살다 간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속도로.
나는 봉투를 열었다.
공증된 서류가 든 것처럼, 봉투는 우직해 보였다. 겉면에는 내 이름이 쓰여있었다.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봉투를 잠그는 단추와 실을 만졌을 때 까칠한 성격을 가진 여자의 피부를 만지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봉투 속에는 서류라기보다는 종이가 들어있었다. 단 한 장, 내 지문의 마찰력으로 문질러봐도 한 장이었다. 그리고 단 한 문장이 씌어있었다.
박길영 씨,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무엇을 부탁하는 것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목적어가 없는 문장은 성가신 앞날이 펼쳐지는 것처럼 불편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듯 가만히 있다 아래로 내려갔다. 여자가 묵직한 돈봉투를 들고 있는 게 보여서인지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저 봉투엔 얼마가 들었을까 생각하는 찰나 여자가 말했다.
—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나는 여자가 스페인출신의 한 피아니스트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1회 끝 · To be continued